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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 (스란소린)

.노른자 2015. 4. 15. 20:55

린님의 리퀘 [스란소린이 입술 박치기하는 거 써줘요!! 레알 실수로 입술 박치기!]의 스란소린.  상황 리퀘에 참신하지 못한 아이디어+호빗 덕력이 약해서 제대로 못 쓴 것을 용서하세요(쭈글 호빗2 스포 있습니다.










어둠숲의 주인, 요정들의 왕인 스란두일은 침소에 들기 전 평소와 같이 술잔을 기울인 시간이 길어짐을 깨닫고는 이내 자신의 미간을 찌푸렸다. 포도주를 마시는 시간이 길어지는 건 중요치 않았다. 스란두일에게 시간이라는 건 중요치 않은 개념이었으며, 잠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포도주를 좀 더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시간과 잠이 그에게 중요했을지라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테다. 단지 잔이 기울어지는 이유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문제였고, 그 사실을 자각한 그의 손은 잔을 내려놓을 때 들리는 마찰음을 더 강해지게 만들었다.

 




스란두일은 기억했다. 외로운 산 아래의 에레보르, 그 아름다운 보석이 가득한 곳 왕좌 옆에 선 소린을.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그 절박한 얼굴을. 그 오만한 드워프들의 성격이 어디 가겠냐만 제 이익만 생각하는 그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인 성격은 언제 겪어도 치가 떨렸다. 무단으로 침입한 놈들의 목숨까지 구해주고 도움도 주겠다고 하였으나 제가 잃을 조금의 보석 때문에 거절하는 멍청함에 스란두일은 그의 선대 드워프들과 같은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게도 붙는 것조차 기분이 상했다. 심지어 자신이 요구한 보석은 본래 자신의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큰 오크통의 반은 비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포도주로 입을 적신 스란두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 감옥으로 발길을 옮겼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비척이는 발걸음은 감히 요정왕을 주시하여 보는 사람이 없음에 쉽게 감춰질 수 있었다. 제 심기를 거슬리게 했던 소린이 갇혀있는 지하 감옥 앞으로 가자 며칠간 제대로 잠도 안 자고 버틴다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도 되듯 불편하고 찬 바닥에 누워 잠든 소린이 보였다. 감옥을 지키고 있던 요정을 시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앞을 지키고 섰고, 스란두일은 작은 손짓으로 그를 물리고는 소린의 앞에 앉았다.

 







바닥을 통해 한기가 느껴지자 술기운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스란두일의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곤히 잠이 든 건지. 왕이라 칭하기도 싫은 그 에레보르 왕의 행색에 스란두일은 코웃음도 칠 수 없었다.



스마우그가 잠들어있는 에레보르로 제 발로 가겠다는 소린을 스란두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 그 고집도. 그리고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를 이해하겠다고 여기까지 내려온 자신이었다. 요정에게 시간은 무한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에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사고를 한 스란두일은 그 발칙한 깨달음에 단정치 못한 행실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니 일으켜 세우려했다.

 




그리고 스란두일은 몇 년, 아니 몇백 년 만에 느껴보는 단순한 통증에 반가워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저와 마주친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와 같은, 자신보다 조금 짙은 청아한 하늘색의 눈이 감길 줄 모르고 뜨여져 있었고 그 눈의 주인인 소린의 감은 눈을 깨운 것은 스란두일의 입술이었다.